[메디컬창] 맹자가 옳았다(영남일보24.10.11) - 김경호원장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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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경영상의학 작성일24-10-15 16:59 조회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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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대구시의사회 부회장·대경영상의학과 원장)
의사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좌절감이 수없이 교차하는 묘한 직업이다. 최선을 다해 환자 곁을 지켜도 멱살 잡히는 것이 일상다반사이고 사회지도층이라는 미명하에 언론에 단골로 뭇매를 맞으며 참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별스럽지 않은 증상의 호전에도 환한 웃음과 따뜻한 고마움을 되돌려 받는 보람과 죽음의 그늘 속에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 놓았을 때의 환희가 있기도 하다. 의사들은 이런 모순을 힘들게 견디며, 이 모순의 원인과 개선책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많은 의사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경제하에서도 돈벌이보다 의학적 양심을 지키며 의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애쓰지만, 의사들을 향한 세상의 비난은 늘어만 간다. 응급실 뺑뺑이, 리베이트 수수, 대리수술, 성추행 등 극히 일부의 파렴치한 일들이 일반화되어 국민밉상으로 매도된다. 의사들의 허물 때문인가 아니면 그 누군가가 특정한 의도로 부추기는 것일까? 그나마 요즘은 이런 물음은 의미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낭만닥터 김사부'를 꿈꾸던 흰 가운의 젊은 이상은 빛바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은' '돈에 눈이 먼'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낙인찍힌 채 제 자리를 떠난 3만명의 의대생과 전공의들만 있을 뿐이다.
맹자(孟子)는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넣지 않는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라고 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다스림에 정직하여야 함에도 정치인들은 권모술수와 위선을 일삼으니 군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고래로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대 정권들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료정책을 제멋대로 이용해왔다. 원가 이하의 저수가를 50년째 강제하고, 면허박탈법, CCTV법 등의 규제로 의사의 운신을 제한했다. 세계 최고의 가성비 갑 의료제도의 주역이 바로 의사들인데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의 푸대접이 당연하게 되었다. 이번 2천명 의대증원 사태는 정치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부는 의사들을 악마화하여 '의료개혁'을 가로막는 엄청난 악당으로 만든 뒤, 이를 이겨내고 '의료개혁'을 완수해 내는 멋진 그림을 그려가는 중이다. 의사의 직업적 자긍심을 뭉개버린 것도, 의료붕괴가 가져올 국민 생명권의 위협도 모두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군자가 되기엔 애당초 글러 먹었다.
이번 의정갈등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응급의료 문제없다'는 한마디로 알 수 있듯 현 정부의 현실감각은 낙제점이다. 이러니 의대 교육 5년으로 단축, 의대생 무조건 진급, 의학교육평가원 인정 취소, 상급종합병원 전문의 중심 전환, 간호법 등 코미디 수준의 탁상공론이 마구 쏟아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의료개혁을 위해 당장 힘들지만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오기와 아집만으로는 다가오는 의료붕괴를 막을 수 없다. 미래 의료의 주역인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11년의 의료공백과 파멸을 각오해야 한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고, 이것을 뒷받침해 줄 의무는 비단 의사들뿐만 아니라 정치권에도 있다는 것을 진중하게 고심해 주길 바란다. 의료붕괴까지 우리에게는 남겨진 시간이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