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칼럼] 짜장이냐 짬뽕이냐, 빠른길이 좋은가, 돌아가는 길이 현명한가?(대구신문 2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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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경영상의학 작성일25-04-03 15:13 조회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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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대구시 의사회 부회장, 대경영상의학과 원장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짜장을 먹느냐 짬뽕을 주문하느냐, 탕수육은 부먹이냐 찍먹이냐, 치킨은 후라이드인가 간장인가? 

 

매번 고민되는 어려운 숙제다.

 

이와 유사한 ‘빠른 길이 좋은가, 돌아가는 길이 현명한가?’는 어떤가? 이것 역시 수없이 인구에 회자되었으나 누구도 명쾌하게 정답을 내지 못하는 난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작전편(作戰篇)에서는 ‘전쟁에서는 오래 끄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兵貴勝,不貴久, 병귀승, 불귀구).’라 하여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한 승리라고 빠른 길을 우선했다.

 

반면 군쟁편(軍爭篇)에서 ‘빠른(直) 길을 돌아가는 것(迂)이 지혜다(迂直之計, 우직지계).’라며 돌아가는 길을 강조하였다.

 

이 두 문구는 얼핏 모순으로 보일 수 있지만, 상충하는 말이 아니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때로는 빠른 길로 직진하고, 때로는 느리게 둘러가는 묘를 발휘하라는 것이지,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은 아닌 것이다.

 

특히, 빠름에 치우치기 쉬운 현대사회에서 둘러가는 신중함을 상기해보고 이 둘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정책들은 이러한 균형을 경시하고 속도에 과 몰입된 듯하다. 직진 일변도로 속도전을 강행하다 보니 득보다 실이 훨씬 크게 되어 

 

이래저래 국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작년 2월, 2,000명 의대 증원 발표가 대표적인 예이다.

 

1년 만에 65% 이상 증원하겠다는 것으로, 초등학교라도 이런 급격한 증원은 무리일 텐데 실습 위주의 의대 교육이라면 더욱 불가능하다.

 

무리한 증원에 반발한 의대생과 전공의 3만명이 교육과 수련의 현장을 박차고 나가면서 의료공백이 발생되고 의료인력의 수급이 끊겼지만 정부는 

 

이 심각한 사태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예년에 비해 지난 1년간 사망자가 급증했다는 통계가 나오고, 대학병원 지원 과정에서 무려 3조원이 넘는 건강보험 재정이 소모되었다.

 

국가적 피해가 눈덩이처럼 급증하고 있는데도 정부의 불통과 졸속 강행은 멈추지 않는다. 의사는 경험 많은 교수의 지도하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임상 경험을 쌓아 나가는 도제식 교육에 의해 양성된다.

 

좋은 교수와 임상 시설, 전문의 교육 과정에는 큰 재정과 최소 11년의 긴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런 급격한 의대 증원은 어불성설이다.

 

현 정부의 조급증이 망친 정책은 의료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공계 연구 분야의 R&D 예산의 비효율성을 개선한다고 3조가 넘는 R&D 예산을 삭감했다가 이공계 연구 홀대 논란이 일자 다시 복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계 연구자들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수많은 인재가 해외로 유출되었다.

 

대세가 기울어진 현실을 무시하고 부산 엑스포 유치를 호언장담하다가 전 국민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불확실한 석유 프로젝트가 마치 따논 당상인 양 ‘2000조원’이라는 구체적인 가치를 발표하여 산유국의 희망을 선전했다가 망신을 샀다.

 

극에 달한 정치권의 혼란은 전세계가 톱뉴스로 다투어 보도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조급증의 화룡점정을 찍고 있다고 하겠다.

 

국가 정책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세밀한 분석과 평가를 거쳐야 한다.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회적인 합의를 중시하며,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해 당사자와 충분히 협상하여야 한다. 정책 방향과 맞지 않으면 개혁을 가로막는 ‘카르텔’로 몰아세워 ‘면허 취소’, ‘형사처벌’ 등으로 협박할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설득하여 개혁의 길을 함께 가는 동지를 만들어야 한다. 빠른 길은 종종 유혹적이다.

 

그러나, 조급하여 속도에 치중하다 보면 대화와 소통이 생략되기 쉽고 이는 쉽게 오해와 갈등을 일으킨다. 그래서 손자병법에서 우직지계(迂直之計)라 하지 않았나.

 

빠른 길(直)을 신속하게 내달음질 하는 것이 좋을지, 돌아가는 것(迂)이 좋을지는 여전히 어렵다.

 

어느 하나에 치우침 없이 시기와 상황에 따라 빨리가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는 유연한 정책운용의 지혜가 절실한데, 그렇지 못한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빠른 길을 고집하다 꼬일 대로 꼬였으니, 차라리 한박자 쉬면서 돌아가는 우직지계(迂直之計)가 더욱 와 닿는 이 춥고 어두운 겨울이 언제 끝날까 한숨만 깊어진다.

 

출처 : 대구신문(https://www.idaegu.co.kr)